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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제의 업적 총정리#병마용 갱 이야기#분서갱유 이야기

지안이네 백.과.사.전 2021. 4. 13.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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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중국 역대 제왕 가운데 가장 대단한 인물로 진시황제를 꼽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가 역사상 최초로 BC 246년 중국을 통일시켰기 때문입니다.

만약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 시키지 못했다면 현재의 중국 대륙은 유럽과 같이 여러나라로 쪼개져 있을지도 모른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는 중국 천하를 모두 평정한 후 황제의 올랐습니다.

황제란 전설로 내려오는 삼황오제에서 다운 왕중의 왕이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중국은 뜻하는 차이나도 진나라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진시황 하면 지하부장갱이 떠오릅니다.

지금도 중국 산시성 시안 중국 근처에서는 대규모 부장갱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이 대규모 부장갱으로 그의권력이 얼마나 대단하였는지를 알아볼수있는 엄청난 유물이다.

그럼 이제부터 이 대단한 진시황제에 업적에 대해서 알아볼까요~!!!

 

진시황제의 업적

당시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할 때에는 각국이 7개국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다.

그래서 각국의 지방마다 문자에 차이가 많았습니다.

진시황제는 천하의 문자를 "소전"으로 정하고 다른 문자들은 모두 폐지시켜 버렸습니다.

이러한 문자의 통일은 중앙집권 정치를 하기 위한 필수적 조건이었습니다.

그리고 분서갱유도 문서의 통일에 대한 유가의 집단적 반대 행동을 제압하기

위한 조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다음 진시황제 유명한 업적에는 도량형 통일이 있습니다.

이 도량형을 통일함으로써 경제 활동을 원활하게 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습니다.

다음으로는 도량형 통일에 이어서 화폐도 통일하였습니다.

이것 또한 당연히 경제 활성화에 기여하였습니다.

수레바퀴 크기와 폭 그리고 도로를 표준화시켰습니다.

이는 교통 도시계획 등 다방면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진시황제는 주변 유목민들의 침입을 막기위해서 주변에 있던 성들을 이어서 만리장성을

쌓았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과도한 농민의 노동으로 이 만리장성 축조를 하는 것은 업적이라고 볼 수도 있고

아니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진시황제의 병마용 갱 이야기

어느 날 시황제의 행차는 낭아산에 도착했다.

시황제는 그 풍경이 맘에 들어 3개월 정도 머물렀는데 갑자기 그곳에서 이상한 것을 보았는데

한 섬이 갑자기 나타나자마자 희미하게 사라져 갔다.

오늘날의 신기루라고 추정하고 있다.)

어느 날 제(산둥성)에 살고 있는 서복이라는 방사가 시황제가 보았던 섬은 전설상의 봉래산 이었다고

주장하고는 봉래산에서 불로불사약을 구해오겠다고 했다.

서복이 갈 배에는 수많은 보물과 소년소녀 3000명이 실렸다.

그리고 서복은 떠났으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서복이 탄 배가 지금의 일본으로 가서 그곳에서 정착했다는 설이 있다.

시황제가 불로불사약을 너무나도 간절히 원하고 있어서 각지에서 수상쩍은 방사들까지 모여들었다.

그들은 어디 어디 가면 구할 수 있다던가, 아니면 자기가 불로불사의 기도를 올린다면서

돈을 뜯어가자 시황제는 효험이 없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법률까지 만들었다.

시황제는 불로불사 약인 줄 알고 먹고 자신의 생명까지 단축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수은이다.

결국 시황제는 불로불사를 꿈꾸다가 마침내는 자신의 생명까지 줄어든 비참한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분서갱유 이야기

기원전 213년, 함양궁에서 큰 연회를 베풀었다.

그때 시황제의 나이는 46세로 절정기였다. 연회도중 박사 순우월이 봉건제와 군현제를 놓고 복야 주청신과

언쟁을 벌였다. 이 때, 순우월이 봉건제로 부활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승상 이사는 30일 내에 진나라의 역사와 의술, 농경 등에 관한 책 이외의 모든 책들을 태워버리라 주청올렸고, 시황제는 이를 받아들여 실행시켰다. 이것이 바로 분서(焚書)이다.

이듬해인 기원전 212년, 시황제는 방사 후생과 노생에게 불로장생의 약을 가지고 오라 명하였으나,

도리어 그들은 시황제를 비판하며, 도망쳐 버리자 화가 난 시황제에게

조정 안에 수상한 학자가 일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학자들은 모두 자기가 아니라며 잡아뗐으나

시황제는 이들을 모두 잡아들였으니, 그 수가 460여 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그들을 구덩이에 넣고 생매장시켰으니, 이것이 바로 갱유(坑儒)이다.

그리고 이를 모두 합쳐서 분서갱유(焚書坑儒)라 불렀다.

이에 분개한 황태자 부소가 시황제에게 간언했으나, 부소는 오히려 시황제의 분노를

사 대장군 몽염이 있는 국경 근교로 유배되었다.

시황제는 북방에 흉노의 침입을 염려하여 대장군 몽염에게 서쪽으로 임도로부터 동쪽으로 요동까지 그 유명한 만리장성을 쌓도록 명했다.

이 만리장성에 동원된 인부가 150만여 명이나 되었고,

그 중에서 죽은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 하였다.

또한, 시황제는 함양 근교에 아방궁을 쌓도록 하였고, 나아가서는 70만 명의 인부를 동원, 함양 근교의 여산 전체에 자신의 능묘를 건설토록 했다. 이런 대토목공사를 하는 동안, 국가의 재정은 엉망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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